빛과 소리로 임하시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행 9,3-7
사울이 내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었습니다.
열심을 낸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도둑이 열심을 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기꾼이 열심을 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열심을 내지 않아도
아니 열심을 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열심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 더 많은 열심을 내는 것을 흔히 봅니다.
어떤 유럽 목사님이 한국 교회를 방문하여 강의를 하였습니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수 많은 한국 교회의 성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출국하시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시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한국의 성도들이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는 것은 딱 세 가지 더랍니다.
첫째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말끝마다 주여 주여, 하나님 하나님...
둘째는, 자기 자신이더랍니다.
주여 주여 하던 실상 속에는 자기 자신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이죠.
셋째는, 돈이더랍니다.
이익을 보고 움직이는 한국교회 성도들...
성도도 목회자도 거기서 거기더랍니다.
물론 한국교회의 단면만을 보고 내린 판단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뼈를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자기부인을 통해서 시작되어지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속에서는 자기부인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직 첫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한 신앙에 불과하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사울이 가던 길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기부인의 과정이 없었습니다.
아니라고 백 번 부인해도 그는 결국 자기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던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주님께서 임하셨습니다.
강렬한 빛으로 엄한 소리로 임하셨습니다.
함께 하던 무리들은 소리는 듣되 빛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그럽니다.
신앙 생활은 하는데
설교는 듣고, 말씀도 보는데
빛은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귀에는 그냥 소리로 들릴 뿐입니다.
말씀이 말씀으로 깨달아지지가 않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솔직한 고백이라도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솔직함마저 고갈되었습니다.
사울이 보았던 빛을 보아야 합니다.
최태용 목사님을 움직였던 그 강렬한 빛의 경험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 그대에게 그 빛이 비추이기 기도합니다.
진정한 이적은 내가 하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 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이방(로마) 선교에 부름을 받은 사울이
로마식 이름인 바울을 사도행전 13장에서부터 사용합니다.
사울이 바울되어지는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유대라는 틀에서 로마라는 보다 큰 틀로 나아간 것입니다.
하늘의 뜻에 자신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바울도 사울 속에 있었고,
사울도 바울 속에 있었습니다.
사울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바울은 '작다, 단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작아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비밀의 세계
단념하지 않으면 쥐어지지 않는 주님의 나라
그 경험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대 속에 사울이 있고, 더불어 바울이 있습니다.
빛과 소리로 임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당신 속의 바울이 깨어나기를...
2004. 7. 무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