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체스코와 함께 하루를
성 프란체스코와 함께 하루를
아마도 서구사회에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만큼 영적 상상력을 발휘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도 그가 이룬 정도로, 그가 취한 방식으로, 종교와 문화의 벽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이 특이한 인물에 온 세계가 전례 없이 호감을 보이고 있거니와, 여러 세기에 걸쳐 그는 “작고 가난한 사람”(the little poor man)으로 불리었다.
세계 각처의 정원과 공원에 그의 동상들이 서 있다. 키가 크고 조용하고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 표정으로, 더 친절하고 더 온유한 세상을 희망하며, 자기 어깨 위에 앉아 쉬려고 날아오는 새들을 향해 팔을 공중에 들어올리고, 숲의 짐승들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다.
실제로 프란체스코는 새들에게 설교하고 벌레들을 가엽게 여기고 돌들 위로 얌전히 걷고 해와 달과 별을 형제자매로 대하였다.
그러나 그의 영혼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그가 어떤 값을 치르고 어떤 각오로 얼마나 애를 써서 우리를 매혹시키는 그 깊은 평온을 얻게 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프란체스코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낭만적인 산책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거칠고 엄격하고 혁명가다운 영혼의 항해자였다. 그는 감상적인 구원과 값싼 은혜를 전하는 사람도, 재치 있고 친절한 얘기꾼도, 서로 다투는 영혼들을 화해시키는 조정가도 아니었다.
그는 가난이라는 은유(metaphor)를 말하며 안이하게 사는 쪽이 아니라 실제로 거칠고 가난하게 사는 쪽을 선택하였다.
그가 세상 모든 피조물을 사랑한 까닭은 그것들이 예쁘고 귀여워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들 안에서 공동의 창조주를 비추는 거울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적이고 다양한 수준의 영성가족을 설립하고 이끌고 보충하고 운영한 실천의 사람이었다. 스스로 마음을 속이는 자들에게는 등을 돌렸고, 자기 자신과 영적 도반들에게 요구한 문자 그대로의 실천적 가난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은 돌려보냈다.
프란체스코는 1181년 무렵 아시시의 한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는 부잣집 도령답게 으스대며 장난스러운 행실로 젊은이들의 영웅이 되었다. 또한, 모험심에 부풀어 전쟁터에 나갔다가 거기서 포로가 되기도 했다. 고향인 아시시로 돌아왔지만 예전의 삶으로 복귀할 마음이 없었고, 젊은 날의 꿈이었던 군대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그의 인생을 크게 뒤바꿔놓은 세 가지 사건이 있다. 아버지와 오랜 친구들을 등진 대가로 그는 황폐해진 시골 교회를 재건하고 극빈한 삶을 선택한다. 그 무렵 나환자들을 만나는데, 자기 속에 있는 뿌리 깊은 혐오감을 극복하고 그들을 껴안는다. 그리고 어느 주일 미사에서, 지닌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감동받아 평생을 그렇게 살기로 결심한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13세기에 세상을 향해 보여준 반응으로 오늘 21세기 세상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그 방법과 동기를 보여주는 특별한 인물을 만난다. 그는 가난한 사람으로 살기를 선택하였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항상 부러워했다. 그의 가난은 오늘 노숙자들의 가난만큼 아프고 가혹했다.
프란체스코와 함께 가는 이 여정은 가난과 겸손뿐 아니라 오늘 모든 영성생활인들이 마땅히 회복해야 할 연민과 자비(compassion)를 보여주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프란체스코 영성은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한 영성의 전형이 될 만하다. 그는 정책적으로 요구되고 지도적으로 실천되어야 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가난과 겸손에 뿌리내린 연민과 자비의 영성을 문자 그대로 살았던 것이다.
엄격하고 영감에 찬 사람이 조용한 자신의 정원에서 나와 번잡한 세상의 우리에게 완벽한 안내자가 되고, 그의 영성생활이 굶주리고 탐욕스런 세대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범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절묘한 역설이라 하겠다.